마을 만들기라는 말이 많이 퍼지고 있다. 주로 농촌마을에서 쓰는 말인데, 사람도 떠나고 삶의 터전도 피폐해진 마을에 알맞은 산업을 일으켜서 마을의 공동체성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다.
마을만들기는 농어촌지역이 아닌 도시지역에서도 있다. 1980년대까지의 도시 지역공동체 운동은 주로 빈민지역에서 일어났다. 비슷한 생활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어서 공통적인 활동목표 설정이 쉬웠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90년대 이후 대규모 빈민거주지역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도시에서 지역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점철된 도시의 공간적 환경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곳에서 인정과 문화가 흐르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와같은 도시의 마을만들기 운동의 사례를 간직하고 있으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곳이 있다. 바로 서울시 마포구의 성미산 주변의 이야기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성산동, 망원동, 합정동, 연남동, 서교동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그들은 도시빈민도 아니고, 생존을 건 투쟁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도시에서 공동체적 삶을 희구하는 시민들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환경과 지역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고, 승리했다.
다음은 유창복(짱가) 사단법인 사람과마을 문화분과 이사가 말하는 성미산을 중심으로 한 마을만들기의 사례이다. 유 이사는 부산MBC부설 (사)문화도시네트워크에서 주최한 ‘마을만들기와 커뮤니티 활성화’ 강좌를 위해 부산으로 왔다. 이 기사는 2008년7월14일, 부산 아트 갤러리에서의 발표 내용을 녹취, 정리한 것이다.
<녹취와 정리 : 정윤식>

성미산 마을 사람들
공동육아로 시작한 성미산의 마을만들기
오늘은 마을의 역사라 그럴까요. 공동육아로 비롯해서 어떻게 마을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지난 얘기하듯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고 주민입니다. 우리 애가 일곱 살 때 거기 이사 가서 지금은 열여덟 살이니까 만 12년째 살고 있습니다. 그 커뮤니티에서는 제법 고참소리 듣습니다. 공동육아가 생긴지 15년 되었으니까, 공동육아 3년째 저희 집 애를 우리어린이집에 보냈거든요. 우리 애 어린이집 졸업하고, 학교 보낼 때 방과후학교가 그때 처음 생겼어요. 도토리마을이라고. 거기에 우리 애를 보냈죠. 그 애가 초등학교졸업하고 중학교 갈 때 성미산대안학교를 만들어서 저희 집 애가 갔습니다. 성미산 1년 다니다가 재미없다 해서 영등포에 있는 하자센터의 노리단에 가서 한 삼년 극단 단원생활 했습니다. 나중에 졸업할 때 프로필을 보니까 2백 몇 번을 공연을 했더군요.
얘가 지금은 대학가겠다고 검정고시 응시해서 얼마 전에 붙고, 음악대학을 가겠답니다.
저는 12년간 마을에서 주민으로 살았습니다만, 그때는 마을 만들기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3년 전에 마을 만들기라는 말이 생겼고, 외부에서 우리더러 너희들 하고 있는 것이 마을 만들기라고 해요. 그래서 요즘은 마을만들기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어린이집이 1994년도에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마을의 시초, 기원, 민들레 홀씨 같은 것이지요. 그때는 마을이라는 것은 꿈도 안 꿨고, 그저 맞벌이가구 부부들이 한 20여 가구 모여서 애들을 어떻게 키워야 될지 막막해가지고 어찌하면 좋을까 하다가, 아 그런 프로그램 있다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양대 정병호 교수께서 프로그램을 제안하셨죠. 뒤에 들어보니까 그분은 마을의 개념이 있으셨더라고요. 그분은 15년 후의 이 마을을 프로그램 속에서 기획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때 참여했던 주민들은 전혀 그런 의식이 없었습니다.
다 맞벌이고, 유치원 보내는 것 마음에 안 들어서 시작한게 공동육아입니다. 그때 유치원에서 인지교육이니 해서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친다. 뭐 가르친다고 했죠. 어떤 어린이집은 아이들 재우려고 약을 타 먹인다고 신문에 났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공동육아입니다.

성미산어린이집
끝장토론 속에서 소통의 방법을 찾다
그런데 이게 왜 마을의 시초냐 하면 이 공동육아의 경험이 마을의 동력이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는 공동육아는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두 번째는 공동육아를 통해서 협동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경험한 협동의 승리, 협동의 성취, 위력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그것이 마을을 만들었다, 그래서 공동육아가 지금의 성미산 마을의 시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생활의 필요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십대 초반의 맞벌이 부부에게 첫 아이 문제는 결정적인 문젭니다. 이건 이념의 문제도 아니고, 내 새끼 어떻게 키울까라는, 인생의 가장 큰 프로젝트입니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여 가구가 모였다는 이것이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두 번째는 협동의 경험인데요. 단적인 예를 들면 어린이집에 식단 한 개 짜는데 며칠 걸렸어요. 전문가들이 하면 두 시간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박삼일 걸려도 결정이 안 납니다.
왜냐? 우리 집은 아토피 때문에 계란 안 돼. 저 집은 성장기에 단백질 중요한 공급원이기 때문에 계란을 꼭 먹여야 돼. 이게 다수결로 될 것 같습니까? 절대 안 돼죠. 새끼들 문젠데 다수결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이건 전원이 만장일치로 합의하지 않으면 결정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결정 나겠습니까?
2박3일 토론하다보면 지칩니다.
내가 양보하지. 내가 여기서 포기를 해야지 결정 나지, 아니면 내일 또 회의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결정 납니다.
어쨌든 공동육아에서는 다수결이 없습니다. 모두가 공감하고 모두가 합의할 때까지 끝까지 토론하는 전통, 이것은 어린이집에서 경험한 협동의 첫 경험입니다.
너무 난 코스죠. 처음에는 무척 지겹죠.
결국 우리는 무엇을 배우냐 하면, 말 잘하는 사람에 의해서 의견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다 말 잘하면 2박3일 토론해도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빨리 합의가 되려면 내가 말을 줄이고 들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 말을 들어야 된다는 것을 회의 서너 번 하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말 잘하는 사람도 말을 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한 참소통의 경험이고, 협동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박삼일동안 하다보면 술이 나오죠. 새벽 세시까지 하다보면 술 없이는 못 버팁니다. 이야기가 나오죠. 옛날이야기, 고향이야기 다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아빠는 집에서 엄마에게 하고, 엄마는 아빠에게 합니다. 부부 두 사람이 동시에는 참여를 못합니다.

성미산 마을 전경
사람들 흠잡기도 하죠. 남편 술 먹은 것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회의 몇 번하다 보면 그 집에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압니다. 친해집니다.
처음에는 공식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위해서 멋있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널브러져서 눕고, 난닝구 자락으로 다 내놓고 이렇게 자기 사는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은 친해지는 거죠. 친해지는 것보다 소통의 기초가 있을까요?
그다음 중요한 게 이사회 구성하는 겁니다. 애가 세 살 때 어린이집에 들어오면 다섯 살 정도 되어서 이사나 이사장 해야 합니다. 20가구 되는데 돌아가면서 다 한 번씩 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한 번 맡으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특히 아빠가 맡으면 백팔십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애 키우는데 무슨 남자가 가서 하나, 그냥 여편네들끼리 이야기하면 되지 라며 겉돕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이사를 한 번 맡으면, 큰일을 누가 결정하겠냐, 아빠가 좀 나서야지 하면서 딱 나섭니다.
자기 역할이 있을 거라고 참여하다 보면, 아빠가 여성들이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아빠들이 배웁니다.
엄마들이 이야기하면 아빠들은 답답합니다. 엄마들은 맥락으로 이야기하고 맥락으로 소통합니다. 스토리텔링이라는 방식으로 소통하는데 아빠들은 그게 아니잖아요. 요점만 이야기하고, 다그치잖아요. 이걸 아빠들이 배우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아이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공동육아 이념은 여러 이웃들이 함께 아이를 키우자는 것입니다.
부부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당연한 이론인데 사실은 잘 안되잖아요. 아빠들이 하는 집안일이나 아이돌보는 것은 다 하청이잖아요. 엄마가 요거해 하면 그거만 하면 끝이잖아요.
이 태도가 바뀌는 것, 공동육아의 큰 성과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아빠가 공동육아에 참여하면서 자기 변화를 합니다.
공동육아 간부는 마을 운동의 사관학교 과정
그다음, 어린이집 이사로 참여하면서 마을 일에 관계를 합니다. 왜, 어린이집 대표자회의를 합니다. ‘간부들 모이시오.’ 지역의 모임을 합니다. 이 사람들이 마을을 알게 됩니다. 마을의 대소사를 알게 되고.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면서 마을에 관심을 갖고 끼게 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마을의 활동가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린이집 이사를 역임한 사람은 마을에서 활동가 스카웃의 일순위입니다. 그 사람들은 조직을 운영해봤고, 소통의 기본을 압니다. 들을 줄 알고, 엄마들의 소통방식 이해하고, 조직을, 대단히 민주적인 조직을 운영할 줄 안다는 거죠. 그래서 어린이집을 마을의 활동가 사관학교라고 합니다.
실제 활동가들은 여기서 다 걸러져서 나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린이집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좀 딱딱한 표현으로 검증이 됩니다. 마을에서 싸움을 할 사람일지 어울려서 조정을 할 사람인지, 어울릴 사람인지, 혼자서 잘 할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냅둬 하는 사람은 냅둡니다. 냅둬도 알아서 합니다, 냅둬야 할 사람을 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냅두면 절대 안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아야 합니다. 그런 걸 다 어디서 검증하느냐. 어린이집 사관학교에서 검증합니다.

성미산마을의 유기농반찬가게 '동네부엌'. 처음에는 가정집에서 조리하다가
8명의 엄마들이 500만원씩 출자하여 매장을 냈다. 앞에 놓인 반찬통은 월회원용
이런 어린이집이 우리 마을에 네 개 있습니다; 일호점, 이호점. 있고, 삼사년 간격으로 분화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어린이집이 점차 마을로 넘어가죠. 그 이유는 애들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집 때는 아이들의 게임 통제가 가능합니다. 부모들이 모여서 다 삼십분으로 하자고 담합합니다. 애들이 꼼짝 못하죠. 그런데 학교 가니까, 일학년 일학기 까지는 되는데, 이학기 되면 달라집니다. 저 애는 피시방 가는데 왜 우리는 못가냐. 다른 집은 게임 사십분인데 왜 우리는 삼십분이냐?
그래서 우리끼리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학교 보내니 알게 됩니다. 지역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까? 그러면 방과 후를 지역사회에 열자. 시도를 했어요.
지역사회 방과후를 열려면 보증금이 있어야 합니다. 이걸 지역사회 백만원 이백만원 내라고 한다면 낼 사람이 없어요. 그 당시 조합비가 삼백만원이었는데, 그 돈이 적지 않잖아요. 그 돈도 없는 사람이 많아서 포기했어요.
공동육아라는 가치는 지역사람이 사기에는 비싼 가치이구나. 오히려 위화감만 느끼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역사람들에게 적당한 가치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먹거리에 착안했습니다, 그 당시 2천년 초반에도 먹거리 캠페인이 일어났죠. 그래서 생각한 게 마포 두레생협입니다.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생협의 주역들은 공동육아 어린이집, 간부를 지낸 사람, 걸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사 열 명이 생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생협 운동을 하던 주민이 있어서 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생협을 한 이유가 또 있었어요. 생협을 만들면 지역 방과후 설립시 교사 2명의 인건비를 지원해준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지역의 열린 방과후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죠.
관심의 발전-공동육아에서 방과후, 방과후에서 마을로
생협을 만들고 6개월 후에 약 30여 가구가 지리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가는 날, 어느 아빠가 성미산 초입에 팻말을 봤다고 합니다.
‘뭔데?’
‘배수지 어쩌고.....’
지리산을 갔다왔는데, 어린이집 선생님이 ‘산에 배수지가 만들어진다는데 아시냐’고 묻습니다.
‘그런 이야기 들었다’ ‘그게 뭔지 아느냐고’ ‘산에 안정적인 수압을 유지하려고 깨끗한 물 공급하려고 하는 걸로 안다. 좋은 공익시설’
그랬더니 교사들이 화를 냈습니다. 이건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저 산이 어떤 산인 줄 아느냐, 당신들 자식들이 해가 중천에 걸리면 맨날 올라가는 산, 여러분 아이들의 비밀장소가 있고, 곳곳에 이름을 다 지어놓은 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산은 자녀들의 꿈의 동산이다. 저 산이 헐리면 아이들의 꿈이 헐리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감동 먹어가지고, 지켜야지, 지킨다고 합니다.
그때 캠페인이 시작되었죠. 2년간의 캠페인 말입니다. 교사들의 눈물이 참 셌죠. 교사들이 얘기하면 아빠들이 이야기 잘 듣습니다.
성미산을 환경적 의식이 투철해서 나선 것은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매일 산에 올라갑니다. 우리가 산을 지켜야겠다고 가니까, 이미 그 산에는 육십 칠십 먹은 노인들이 새벽 네 시부터 산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산에 오신지 얼마 되었어요?’ 하니까 삼십년 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어린이집을 통해서 젊은 엄마아빠들이 아이를 키우자고, 협동을 경험했다면 생협을 통해서 지역사회와 협동의 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면, 성미산 싸움을 통해서 지역사회의 젊은 사람들이 협동을 했습니다.

성미산 감시 천막
예를 들면, 상수도 사무소에서 입심 센 사람들 앞장세웁니다. 그 사람들이 제일먼저 자극하는 것은 ‘너희들 원정대지?’ ‘딴 마을에 사는데 성미산 지키려고 원정 온 데모꾼들이지?’라고 합니다.
그 당시 우리는 삼십대 초반이었고 설명할 길도 없었어요.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이 ‘아니, 이 아빠가 아무개 아빤데 산지 오년이 되었는데, 너 무슨 근거로 그러냐’고 넘어가실 듯 화를 내면 그 사람들 꼼짝 못합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원정대지 하는 마타도어가 전혀 안 나왔습니다.
노인네들이 시위는 한 번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뒤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성미산 투쟁은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저희들에게는 병풍이고 큰 힘이죠. 새벽에 저희들이 딱 1년 반 싸울 때, 절 밑에 기습벌목을 했습니다. 포클레인이 올라왔습니다. 저희들은 출근하다가 삐삐 핸드폰을 받았습니다. 다 와서 몸으로 막고, 그날 저녁에 동네 마을회의라는 것을 처음 했습니다. 2002년입니다.
세 시간 반 동안 마라톤 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무조건 산에 올라가서 천막 농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설 바로 전날입니다. 아빠들 세 명이 교대로 슬리핑 백 가지고 천막에서 산을 지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날 차례 지내고, 시골 가려던 사람들은 다 취소하고, 이래서 그날부터 딱 백일간. 저녁 아홉시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 지킵니다. 새벽 다섯 시부터는 동네 할어버지들이, 열시가 되면 설거지 끝낸 엄마들이, 두세 시 되면 자영업 하는 사람들이 교대합니다. 밤 아홉시 되면 아빠들이 다시 올라갑니다. 이렇게 이십사 시간을 교대로 합니다.
그 이야기만 해도 이박삼일 해야죠. 예를 들면, 아빠들이 그냥 올라가겠습니까? 그 긴 밤을 어떻게 지내라고. 술을 가져갑니다. 나중에는 몸수색합니다. 팩에 넣어서 가고, 파묻어놓고 가고 그럽니다. 술 마시니까 이야기 합니다. 성미산 이야기하다가, 애새끼 이야기 하다가, 직장 이야기하다가, 마누라 이야기하다가, 돌아가면서 하는 건 마을 이야기, 애들 이야깁니다.
거기서 성미산 학교 만들자고 모의했죠. 성미산 차병원(카센터)만들자는 것도 거기서 이야기했고, 거기서 마을의 모든 프로젝트들이 이야기됩니다. 거기서 세 사람만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요. 아빠들이 집에 가면 엄마들한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엄마들이 올라가서 다른 엄마들한테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 돕니다. 우물가에서 말이 돌듯이 이곳에서 돕니다. 이렇게 해서 공론화됩니다.
결국은 성미산 싸움은 환경이라는 것 보다는 아이들의 고향을 지키자 했던 것입니다.
2년간의 협동이란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만가지 희노애락이 다 있잖아요. 그분들과 우리 사이에는 필설로 할 수 없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역사회와 어린이집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가 협동을 경험한 것이죠. 그게 결론입니다. 협동의 의미는 아까 말씀드린 데로 지역사회 차원의 협동이면서, 두 번째 의미는 세대 간 협동입니다. 어린이집의 협동은 삼십대 초중반 동세대들의 협동입니다.
그런데 협동이 육칠십 대 노인에서부터 저희들 교사들까지 넓어집니다. 교사드은 저희들보다 5~10년 어리죠. 그리고 성미산 싸움에는 어린이들이 나옵니다. 동네 애들이 녹음 다 하고요, ‘발로차, 발로차, 성미산’ 월드컵 노래 개사해가지고 녹음해서 부릅니다.
지역의 어르신들과 산을 놓고, 노인들과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관에서 하는 것 어떻게 막어, 개발되면 땅값이 오를걸,’ 그래놓고, ‘여기 삼십년 전에는 말이야, 이 산이 다 연결되었는데, 여기 도살장이 있었고,’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그 어르신들이 당장 땅값을 이야기했지만, 삶의 내면에는 삼십 년 전 추억이 있었고, 마음속 깊은 곳에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이에요. 다 아는 거예요. 그냥 아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는 소통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공공의 이슈를 가지고 협동했다는 겁니다. ‘애를 잘 키우자’ 보다는 좋은 먹거리가 좀 더 공공적이죠. 그리고 성미산은 좀 더 공공적 이해가 걸린 겁니다.
직접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우리지역사회 모두의 공공재를 지키고자 나섰다 하는 점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협동의 경험 아니었을까, 이후에는 자기의 이해관계 아니어도 우리는 협동했다는 경험을 우리세대가 아니라 최소한 아이세대는 기억을 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다, 전통이다 라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성미산 마을에서 카세어링에 참여하는 사람들. 6가구가 차 한대를 같이 쓴다.
차 병원에서 소출력 방송까지 - 성미산 에너지의 확산
저희들은 포스트 성미산을 고민했습니다.
성미산 싸움은 큰 분수령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성미산 네임이 많습니다. 성미산어린이집, 성미산학교, 행정구역상으로는 마포구 망원동이고, 우리 동네를 성미산 지대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세가지 의미를 갖는 협동의 경험이 승리로 끝나고, 승리의 에너지가 갈 바를 모릅니다. 이 기쁨과 어디 가겠습니까? 결국 이 에너지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옵니다. 민가로, 제일 먼저 한 것이 차병원 만들었습니다.
거금 팔천만원 만들었습니다. 조합원들 삼십만 원씩, 십만 원씩 모은 돈, 오백만원, 백만 원 내서 팔천만원 만들었습니다. 한 달에 삼십 명씩 가입을 하던 생활협동조합의 조합원이 하루에 몇 명 가입했습니까? 하루에 백삼십 명 가입합니다. 지금 이천사백가구 됩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가족 수로 따지면 칠천 명이 넘습니다.
그다음에 동네부엌이라는 반찬가게가 만들어집니다.
마포연대라는 시민단체가 만들어집니다. 성미산 싸움을 하면서 구청과도 대립점이 생겨서 싸움이 뭔지를 알게 됩니다. 서울시와도 대립점 생기고, 그 대립을 활용하고, 대립전선에 서서 활동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다 해서 마포연대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큰사고 한번 치죠.
성미산학교를 만들게 됩니다.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삼십오억 원어치 사업을 만들어줬습니다.
마포에프엠이라는 소출력 방송도 만들었고……. 참 많은데요. 이것 다 설명 못하겠는데 하여튼 성미산 싸움 뒤에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또 언론이나 시민사회에서 칭찬을 하니까, 진짜 잘 하는 줄 알고, 신나서 하는 거죠.
마을은 마을의 특기가 있습니다. 자뻑(자기도취)문화입니다. 누구나 모이면 다 자뻑입니다.
그러고 나서 더 잘하자 합니다.
그렇지만 마을이 이렇게 확장되니까, 경험하지 못한 어려움이 생깁니다. 소통이 안 된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삼년 전부터 이런 말 있습니다. 2003년에 성미산 싸움이 승리로 끝났고, 이천오년 육년 되니까, 소통이 안 된다. 전 같지 않다, 마을이 왜 이러지 이런 말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마을이 커지니까. 옛날에는 어린이집 두 개 모여도 사오십 가구 모여서 마을회의 다 끝납니다. 그러면 모여서 평가회 하면 자뻑, 잘했네, 더 잘하자, 술 한 잔하고 끝납니다.
마을의 새로운 고민 - 다극화 속에서 어떻게 비전을 공유할까
그런데 기관이 열 몇 개 스무 개 되니까, 회의하기 어려워집니다. 전체가 모일 곳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회의날짜 잡기가 어려워집니다. 겹치는 것 없는지 마을 공동캘린더가 있어야만 약속장소가 겹치지 않습니다. 겹치면 결정적으로 큰 힘이 안 돼요.
두 번째는 각 단위 활동가들이 외롭다고 하소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다 모여서 자뻑 했는데, 활동가끼리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외로운 거예요. 그래서 위로받고 싶은데, 그래서 다른 기관 활동가들한테 나 사실 외로워, 위로해 줄줄 알았죠. 그런데 그 사람은 더한걸.
그다음에는 일이 잘 안 되는 것 같다는 것. 처음에는 잘 될 줄 알았어, 카센터 잘 될 줄 알았어, 마포 에프엠도 자원 활동가 없이 주민들이 다 방송하고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주민이 할 줄 아는 게 없거든. 소위 전문가주의, 전문가들이 득세하게 됩니다. 이걸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렵다는 이야깁니다.
요약해보니까 이런 거죠. 외롭다 얘기는 하는데 뭐가 어려운지 잘 모르는 거죠.
암울한 분위기가 마을에 있는 거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소통을 키우자. 이제는 총동원시대가 지났다. 다시 키우자. 소통시스템이 재구성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성미산 축제 장면
두 번째, 어렵다는 이야기 두 가지.
하나는 자원의 문제입니다. 일을 하려다 보니, 일이 많아지다 보니, 일이 열배 늘었다 해서 활동가가 열배 늘지 않습니다. 일이 열배 늘면 활동가는 다섯 배가 늡니다. 그럼 무슨 이야깁니까? 한 활동가 당 이분의 일만큼만 자원이 조달된다는 이야깁니다. 물적자원도 마찬가집니다.
예전 총동원 체제에서는 주머니에서 조금씩 냈는데, 이제는 주머니에서 십시일반해도 너무 많아져서 한번내면 될 것을 열 번 내야 됩니다. 물적 자원의 조달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세 번째, 활동가들이 일이 잘 안 된다고 하는데, 성미산을 지킨 마을의 전통을 나는 깎아먹는 사람이다. 나 때문에 일을 망치는구나, 나는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이구나. 선배들은 잘 했는데 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 일 속에서는 비전이 잘 안보여요. 비전은 높은데 올라가야 하고, 떨어져서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쳐다봐야 자기 일에 비전이 보이고, 비전이 보여야 일에 힘이 생기는 겁니다. 비전이 안 보이니까 힘든 거예요.
그래서 지역차원의 정책자원의 필요가 있다는 필요가 느껴져서 세가지 과제가 도출되었습니다.
1. 다극화 차원의 소통기술.
2. 인적 물적 조달의 합리성
3. 정책적 차원의 비전을 공유하는 것.
이것은 최근에 한 진단인데 우리 마을에는 이런 것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건교부에서 살고 싶은 마을 해보라 그래가지고 제안서 쓰는 과정에서 우리 마을의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적정한 금액을 받았습니다. 일억 원. 일억 가지고 싸울 일은 없죠, 마을의 규모가 있는데.
일억 가지고 실무자 다섯 사람을 공개모집했습니다. 모두 주민들입니다.
전업주부인 엄마 3명, 다른 시민활동하고 있는 사람 한명, 그리고 대기업에서 인사부장 하던 분이 손에 너무 피를 묻혀서 회의를 느껴서 그만두고 육십만 원 받는 일에 자원을 했습니다. 다섯 분이 다섯 개 분과 팀장을 맡았습니다. 그 인건비로 일억을 쓰기로 한 거죠. 거기서 논의한 결과입니다.
최근에는 지역사회에서 접점이 많이 생기니까, 구청과 동하고 관계가 생깁니다. 특히 지역사회의 집주인들한테는 성미산 지킴이가 나쁜 놈들입니다. 저것들 때문에 성미산 개발이 안 되어서 집값이 안 오른다고 아직도 원망하고 있습니다.
성미산 지킴이 하면 이중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온갖 괜찮은 사람들이 있고, 행동력도 있고, 뭔가 좋은 일을 위해서 하는데, 그런데 과격해, 조직적이야. 그리고 관에서 하는 일 안티야. 그 때문에 땅값이 안 올랐어.
지역사업을 하려니까 이런 이미지가 부담스러웠습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축제 때 구청장을 초대했습니다. 내부에서 논쟁이 있었죠. 왜 민간 축제에서 민간주도의 정신을 훼손하나.
마을에서는 게시판에 논쟁이 붙고, 제가 집행위원장인데 박살났어요. 사과했어요. 미안하다. 내년에는 좀 더 세련되게 하겠다.
그런데 그때는 이유가 있었어요. 구청장을 앞세워서 지역사회 이미지를 개선시켜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공을 활용했습니다. 그 당시 여성부 장관도 오고 구청장도 왔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신문기자도 오고 방송도 오니까, 어 재들 무슨 안티, 데모꾼 이미지였는데, 장관이 와, 구청장 와서 인사 하네라고 생각하는 긍정적 효과 있더라고요.
요즘 거버넌스라는 말 나옵니다만, 그런 말을 쓰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초기 진정성을 전유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끼리 사는 섬이 아닙니다. 그런 게 요즘 달라진 것이고, 사람과마을이 앞장서서 합니다.

유창복 이사
“마포 에프엠에 대해서...”
질문 : 마포에프엠방송의 효율성과 주민들 반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 마포에프엠은 시범운영하는 8개 소출력 방송 가운데 한 개입니다. 자체제작방송은 열아홉 시간이고, 자원활동가가 백여 명입니다. 자원활동가의 팔십 프로는 대학생입니다.
프로그램의 이십프로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입니다. 노인들이 직접 제작해서 당신들이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는 아줌마들이 제작하는 프로그램과 장애인이 직접 제작하는 프로그램, 성소수자 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지역사회 소수자들이 라디오 매체를 통해 지역사회 주민과 소통하고, 나아가서 방송제작 활동을 통해 자기들끼리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 소출력 방송의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조금 더 확장하려고 합니다. 주민들이 현재는 전화인터뷰 정도합니다. 라디오스타 영화 보셨죠. 그런 거 생각하면 됩니다. 저도 잠자다 깨서 인터뷰하고, 동네 애들도 합니다. 방송하다가 실수도 하고요. 저는 동네에서 짱가라고 부르는데, 다른 사람들도 별명으로 부릅니다. 방송에 대고 그런 언어를 씁니다.
방송의 한계점은 1와트라서 송출범위가 넓지 않습니다. 많이 듣지 않는 것은 와트의 문제라기보다는 공중파 라디오 수신하는 사람들에게 접근이 잘 안 됩니다. 직장인들은 차 안에서 방송을 듣는데 강 건너가면 잘 안 들립니다. 주부들은 여성시대 이런 걸 듣지, 찾아서 듣기 어렵습니다. 자영업자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메이저 공중파와 경쟁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출구는 인터넷 기반으로 리얼타임 하는 겁니다. 재방송이 가능하니까. 이런 걸 라디오 방송에 도입하면 어떨까 논의 중입니다. 그런 방향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건대 기초 자치단체별로 소출력 라디오 방송이 하나씩 있으면 합니다. 태국이나 칠레나 베네주엘라나 이런 데는 소출력 라디오 방송이 무지무지 많다고 그럽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경제규모에 비하면 소출력 라디오 방송은 낮은 수준이죠.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미산 축제는?”
질문 : 성미산 축제대회에 문화단체가 참가합니까?
답변 : 문화단체는 없고, 매년 축제 집행위원회가 구성됩니다. 마을에는 동아리가 십여 개 있습니다. 엄마들의 살사댄스 팀, 아빠들 밴드 동아리, 엄마아빠들이 모인 연극 동아리, 인형극 만들기 반, 등등 많이 있습니다. 축제는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합니다. 그런 식의 일상적인 문화활동하는 동아리들이 있고, 문예단체는 사람과마을에 문화분과 정도가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마을 극장을 개관할 계획입니다. 4개 NGO 단체가 독립된 공간으로 가게 되었다고 해서 지하를 내놨습니다. 건축비를 같이 구하자, 그래서 모금을 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동네 회갑잔치부터 조수미 공연까지 다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동아리도 활성화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마을에서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소통의 구조가 어슷어슷 쌓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여기는요, 어떤 단체가 기획하고 그런 구조가 아니라 다 각자 놀고, 각자 가되, 다만 정보를 주고받는 겁니다. 혼자서 안 되는 것은 뭉쳐서 의논하고, 뭉쳐서 펀드 받고, 이런 식으로 네트웍 시스템이지. 중앙이 의사결정해서 설득하고 이런 구조는 기본적으로 재수 없어 합니다.
또 하나, 우리 문화는 뭐 하자 그러지 말고 네가 해라. 왜 나를 설득하려 하느냐. 좋은 걸 네가 하지. 네가 하는 것보고 좋으면 내가 따라할게라는 겁니다. 너무 계몽적 활동방식은 지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육아는 누가 했나?”
질문 : 맨 처음 공동육아했던 사람들 가운데 자기 집 가진 사람의 비율, 그들의 직업은 뭔지, 지금도 마을에 사는 사람은 얼마정도인지요?
답변 : 우리 어린이집 출신 20가구 중에 아직도 사는 사람은 반 정도이고, 반은 이사 갔습니다. 이사 간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 교육 문젭니다. 공동육아로 키웠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가니까 답이 없어서 대안학교 찾아간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런데 성미산 학교 생기고 나서는 좀 덜 합니다.
그리고 100% 샐러리맨들입니다. 대기업 사원이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시의 평균적인 수준인데, 이런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안합니까? 중산층이고, 집 가진 사람은 5%도 안될 것 같습니다. 조금 다른 것은 학력이 높다는 겁니다. 저희들이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외부에서 볼 때 학력이 일반적인 강북 시민들 보다는 조금 높다고 합니다.
우리가 서민이나 소수자들 계급적 기반의 대중 활동을 했다고 보기에는 분명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소시민, 시민적 차원의 일반적 구성 아닐까 그런 생각합니다.
<이 기사의 사진은 다음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 오마이뉴스, 부안21, 한겨레신문, 여성신문, 마포연대>